My Way Your Way

요괴에 홀리어서

vol.1

괴담을 관광에 되살리다

고이즈미 본, 시마네 현

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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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일본의 괴담을 세계에 널리 알린 고이즈미 야쿠모(라프카디오 헌)가 증조부인 고이즈미 씨. 민속학의 길을 걸으며 야쿠모가 남긴 괴담과 그 정신을 현재에 되살리고자 노력하고 있다.

민속학자인 고이즈미 야쿠모와의 만남

저는 대학에서 민속학의 길로 나갔습니다만, 증조부인 고이즈미 야쿠모(라프카디오 헌)를 특별히 의식한 적은 없었습니다. 일본의 괴담을 재화(옛날 이야기나 민담, 전설 등을 현대 감각에 맞게 새롭게 이야기하는 것 또는 그 작업이나 작품)한 문학자니까, 민속학과는 별개인 거라고 혼자 생각했던 거지요. 작품을 읽은 적조차 없었습니다.

석사과정 재학 중에 영어 논문을 읽는 과제가 나왔을 때, 친구가 "이런 게 있더라." 하며 복사물을 가져다 주었어요.

그것이 미국민속학회지에 수록된 「Lafcadio Hearn, American Folklorist(미국 민속학자 라프카디오 헌)」이라는 논문이었습니다. 제 조상에 대해 쓰여 있기에 사전을 찾아 가며 읽었는데,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야쿠모는 아직 민속학이라는 말도 없던 시대의 개척자 같은 존재였다."라는 거였지요.

그 논문에 따르면, 야쿠모는 그리스에서 태어나 아일랜드에서 자랐으며 미국 뉴올리언스에서 기자 생활을 하다가 일본에 왔는데, 뉴올리언스에 있을 때 크레올 문화(프랑스, 스페인, 아프리카의 혼효 문화) 기사를 쓰고 있었습니다. 크레올 속담 사전도 편집했고, 레시피 모음집까지 내기도 하고 그랬어요. 야쿠모는 저와 똑같은 민속학도였던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것인데, 괴담이란 것이 민속학의 하나잖아요. 부끄럽게도 그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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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야쿠모가 만든 크레올 요리 레시피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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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괴담에는 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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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야쿠모는 『괴담』, 『그림자』 등의 괴담 책을 많이 썼습니다. 괴담을 통해서 인간을 바라보고자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괴담에는 항상 진리(truth)가 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그 의미를 정말로 알게 된 것은, 동일본대지진이 나고 겨우 한 달이 지난 이시마키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야쿠모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미치노쿠(후쿠시마 현, 미야기 현, 이와테 현, 아오모리 현을 아우르는 지역) 야쿠모 모임' 사람들이 피해를 입어 현지에 갔었지요.

아직도 그 냄새가 맴돌고 있는 잔해들 사이에서 "선생님이 서 계신 바로 요 근처에서 아기를 꼭 끌어안은 아기엄마의 시신이 발견되었어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때 떠오른 것이, 야쿠모가 마쓰에의 괴담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했다고 하는 「엿을 사는 여자」였어요.

마쓰에 사람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다이오지라는 절 근처의 엿 파는 가게에, 밤이면 창백한 얼굴의 소복 입은 여자가 물엿을 딱 1리(1전의 10분의 1)어치 사러 왔다. 그것이 이틀째에도 이어졌다. 기이하다 싶었는데, 사흘째에 여자가 엿 가게 주인에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했다. 뒤를 따라가 보았더니, 다이오지의 묘지에서 돌연 사라졌다. 그러자 곧이어 아기 울음소리가 났다. 묘를 열어 보니 거기에 건강한 갓난아이가 있었고, 그 옆에는 매일 밤 물엿을 사러 오던 여자의 시신이 있었다."

야쿠모는 그 마지막에 "어머니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라는 한 줄을 덧붙이고 끝맺었습니다.

잔해들 사이에서, 야쿠모가 왜 괴담을 소중하게 여겨 왔는지 마음속 깊이 알 것 같았어요.

반인간중심주의의 열린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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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야쿠모가 또 하나 소중히 여긴 것이 자연과 인간의 공생입니다. 예를 들면 야쿠모는 벌레가 나오는 작품을 13개 정도 썼어요. 보통 벌레라는 게, 서양인에게는 예술의 대상이 될 만한 게 아닙니다만, 벌레 소리를 사랑하는 일본인에게 공감을 했던 거지요.

야쿠모는 구마모토에서 한 강연 「극동의 장래」에서, 일본이 청일전쟁에서 이기고 더욱 강해지고자 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자연과 공생하는 것, 단순한 삶을 유지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고베에 있을 때는 일본인이 자연재해를 대하는 방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지진과 국민성」이라는 신문 기사를 썼어요. "지진과 태풍, 수해 등, 일본에는 자연재해가 많다. 그 풍토가, 변화를 받아들이는 일본인의 국민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일본을 사랑해서 귀화한 야쿠모는 일본인의 이러한 자연과 공생하는 정신성에 감동했을 것입니다. 'The healthiest and happiest attitude toward Nature(자연에 대한 가장 건전하고 행복한 태도)'라고 말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야쿠모는 인간중심주의를 싫어했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자연이나 초자연의 영적 세계도 있으며, 인간은 그 가운데의 일부다."라고 말이지요. 자연과 영적 세계와 인간 세계. 이 세 가지를 시야에 넣고, 열린 마음으로 인간을 쭉 바라보았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그린 세계와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야자키 감독의 애니메이션에는 초자연적인 세계가 나오고, 인간은 밖에서 묘사되는 대상이 되지요. 제가 아주 좋아하는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은 선주민 너구리의 입장에서 그려져 있습니다.

괴담은 지역의 무형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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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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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여기 시마네 현 마쓰에 시는 야쿠모가 사랑한 곳입니다. 저는 도쿄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대학의 현장 연구에 협력해 준 이즈모 시에 자주 다니게 됐었어요. 그렇게 오가는 길에 마쓰에 시를 들르다 보니 제 조상이나 친척을 아는 사람이라든지 가게와 친분이 생겨, 1987년에 마쓰에 시로 이주했습니다.

지금은 시마네현립단기대학에서 민속학을 가르치며, 야쿠모를 문화 자원으로서 현대에 되살리는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민속학자인 야나기타 구니오도 "민속학은 과거의 것을 고찰하는 작업이 아니며, 그것을 현대에 되살리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한 실천 작업으로서, 2008년부터 NPO 법인인 마쓰에관광연구회와 함께 야쿠모가 기록한 괴담의 현장을 돌아보는 '마쓰에 유령 관광'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야쿠모가 성장한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에 갔을 때 '더블린 유령 관광'에 참가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어요. 아일랜드에도 괴담이나 요정 이야기가 전해 오는데, 그것을 무형문화유산으로 깊이 인식하고 활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있지 않은가, 마쓰에에도." 싶었어요. 본래 마쓰에는 영주가 사는 성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라, 축성과 관련된 전설을 비롯한 괴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괴담이 지역의 자원이라는 것을 그때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민속학자가 글로 남긴다든가 하는 일은 있었습니다만, 관광에 활용하면 세대를 뛰어넘어 계승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관광객에게도 널리 알릴 수가 있고요.

'유령 관광'의 현지 이야기꾼을 육성하는 데에도 힘을 쏟고 있습니다. 거주하고 계신 분들이 이런 일에 더 많은 관심과 긍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데에도 노력하려고 해요.

아이들에게 전해 주고 싶은 야쿠모의 오감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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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마쓰에 어린이 학당'이 방문한 고이즈미 야쿠모 기념관에서, 야쿠모와 관련된 전시물을 열심히 스케치하고 있는 참가자

2004년의 야쿠모 사후 100주년을 계기로, 마쓰에 시와의 공동 기획으로 '마쓰에 어린이 학당'이 만들어졌습니다. 1년에 1회, 오감을 기르는 교육 활동으로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 중학생을 대상으로 여름방학 3~4일을 이용해 개최하고 있어요. 올해로 12회째를 맞이했습니다.

야쿠모의 정신을, 마쓰에의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에게 계승시키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야쿠모의 정신 가운데 가장 전해 주고 싶은 것은 '오감력'이에요.

마침 당시 아이들에게 자연 체험이 부족하다는 게 화제가 되고 있었어요. 일몰이나 일출을 직접 눈으로 본 적 있는 아이가 40%밖에 안 된다고도 했고요. 갑자기 한 사람한테 한 대씩 게임기가 주어지다시피 했고, 휴대전화 또한 급격히 보급되던 시대였으며, 가상 체험이 차지하는 시간이 엄청 늘어나기 시작한 시대였습니다.

야쿠모는 16세에 왼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오른쪽 눈도 0.05보다 나빴던 것 같아요. 그래서 거의 보이지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고 했을 때 야쿠모의 글을 다시 읽어 보면, 청각이나 후각, 피부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컨대 메이지 시대 일본의 일상생활의 아름다움을 짚어 낸 작품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모습』에는 벌레 소리와 게타(일본 나막신) 소리, 인력거에서 느껴지는 냄새라든지 피부에 느껴지는 바람이 등장하지요.

지금까지 '마쓰에 어린이 학당'에서는 벌레 소리를 듣고 구별하기라든지 숲에서 눈을 감고 걷는 블라인드 워킹 등을 실시해 왔습니다. "눈을 감으니까 숲 냄새가 났다." 하는 아이도 있었지요. 올해는 어린이 학당에서 '마쓰에 어린이 헤룬* 8경'을 실시합니다. 8경이라는 것은 눈만 가지고 보는 풍경이 아닙니다. 예컨대 해질녘에 종이 울려 퍼지는 '만종'은 소리 풍경이지요.

*고이즈미 야쿠모를 현지 사람들은 '헤룬'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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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고이즈미 야쿠모가 살았던 곳에서 고이즈미 본 씨의 설명을 듣는다

어린이 학당의 교육 효과를 숫자로는 쉽게 측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 생각한다든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본다든지, 참가한 어린이의 호기심과 상상력이 커져 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오감력을 기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을 기르는 것이기도 한 게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지역에서 오감 체험을 하면, 지역에 점차 관심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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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죠잔이나리 신사에서, 야쿠모가 무척 좋아했다는 '석호(돌로 만든 여우상)'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다

오감력으로 문화의 재발견과 창조를

오감력을 기름으로써 지역의 문화 자원을 발견하고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육성하고 싶어요. 마쓰에뿐만 아니라 일본 전국 어디에나 괴담이나 민간 설화 같은 구전문학 등, 무형의 문화 자원이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활동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처음 마쓰에에 이주했을 때는, 고이즈미 야쿠모의 증손자라고 하는 압박감이라든지, 조상 덕을 보는 것으로 비치는 것이 싫다든지 하는 게 좀 있었습니다. 하지만 '유령 관광'이나 '어린이 학당'을 해 나가는 가운데 그런 압박감이 차차 휙 날아갔지요.

지금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이제 그런 시기는 넘어섰고, 지금은 "문화 자원으로서 야쿠모를 되살리고 싶다." 하는 마음이 가장 큽니다.

이름이 '고이즈미 본'으로 외우기 쉬워서인지. 최근에는 "본 씨." 하고, 주변 사람들이 불러 주는 것이 기쁩니다. 길에서 만나든, 어디서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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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야쿠모가 쓴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모습』 초판본을 들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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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才知弥

인터뷰: 2015년 8월

구성: 야마기시 하야세(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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