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스토리
다마키 슌이치
たまき しゅんいち


난 이런 사람
 

 밝은 성격으로 잘 웃습니다. 활동적이고 언제나 무언가 하고 있지 않으면 시간이 아깝게 느껴집니다. 하고 싶은 일은 바로 실행에 옮기지 않으면 견디지 못합니다. 그리고 할 바에는 어중간하게 하는 건 싫고 무엇이든 열심히 합니다. 하지만 여유를 갖고 즐기면서 하는 것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즐겁게 살고 싶고 후회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때문에 하나하나 목표를 세워 노력합니다.
 저는 낙천적이라 아무 생각도 없는 듯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실은 작은 일에도 깊이 고민하는 예민하고 겁이 많은 일면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도 신경 쓰입니다. 무언가 벽에 부딪혀 이것 저것 고민하고 생각하고, 마음의 정리를 하고 그리고 앞으로 나아갑니다. 언제나 이런 일의 반복입니다. 실은 좀 더 요령있게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 좀처럼 그렇게 잘 안됩니다. 그리고 제멋대로이고 뭘 잘 잊어 버립니다. 전날 했던 말을 다음날은 새까맣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성장과정
 

■어렸을 때
 저는 1982년 오키나와현*1 나하시*3의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 집이 있는 이제나지마*2에는 작은 진료소가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이제나지마 사람들은 출산때 본섬에 있는 병원에 가서 아기를 낳지요.
 어렸을 때 저는 무척이나 개구장이인데다 엄마 말씀을 전혀 안들었던 모양입니다.

■초등학교 때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내성적이라 스스로 적극적으로 행동하거나 남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렸습니다. 자신감도 없고 남의 눈을 상당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에 누가 권하는 대로 담배를 피우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걸 계기로 어느샌가 나쁜 짓을 하는 선배들과 한패가 되어 가게에서 좀도둑질도 하고 오토바이나 차를 훔쳐 타고 돌아다니게 되었습니다. 나쁜 짓을 하고 있으면 솔직히 말해 무서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나쁜 짓을 해 보고 싶은 호기심 같은 것도 강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설령 하기 싫다는 마음이 들어도 선배들을 배반할 수는 없었습니다. 엄마는 내 행동을 알아차리고 엄하게 꾸짖기도 하고 일부러 떼놓기도 하는 등 필사적으로 나쁜 짓을 막으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말을 들어도 말대꾸만 할 뿐 엄마의 말을 조금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상태가 중학교 2학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중학생 때
 중학교 2학년 때 저는 이제나지마 쇼엔 다이코(큰 북)라고 하는 악기를 다루는 다이코서클에 들어갔습니다. 쇼엔다이코 연습은 밤에 있기 때문에 멤버가 되면 밤에도 당당하게 놀 수 있을 거라는 안일한 동기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쇼엔다이코 멤버들은 진지하게 음악에 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멤버들로부터 자극을 받아 저도 진지하게 음악에 임하는 가운데 음악의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영향도 있어 어려서부터 노래는 좋아했었는데 이 무렵부터 싱어 송 라이터가 되고 싶다는 분명한 꿈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나쁜 짓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그만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친구들 꾀임에 차를 훔쳐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그 차에는 터보 엔진이 달려 있어서 액셀을 밟으면 바로 속력이 났습니다. 우리들은 시속 120km의 속도를 내며 커브로 돌진해 갔습니다. 그리고 그 커브를 돌지 못한 채 차가 뒤집어져 버렸습니다. 다행히도 둘 다 다치지는 않았지만 아주 혼이 났습니다. 그 때 「이제 절대로 나쁜 짓 말아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담배피우는 일, 물건을 훔치는 일 등, 일체의 나쁜 짓을 그만두었습니다. 부모님한테도 반항만 했었는데 「아무 것도 못하는 주제에 반항만 하면 진짜 바보지. 우선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자」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설령 그것이 어제까지 해 오던 일과 전혀 다른 일일지라도 어떤 한 방향을 향해 맹렬히 돌진해 나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때도 음악과 축구부 연습에 열중하게 되었습니다. 또 중학교 3학년 때는 추천*4으로 고등학교에 합격한 뒤, 똑같이 추천입학이 결정된 동급생들에게 협조를 구해 「Little Teacher」라는 그룹을 만들어 앞으로 입시를 볼 동급생들에게 과목을 분담해서 가르쳤습니다. 어디를 포인트로 삼아 가르치면 좋은지, 어떻게 가르치면 좋을지, 미리 선생님들게 여쭈어보고 착실히 준비해서 가르쳤습니다.

 

고등학교 생활
 

■하에바루 고등학교에
 오키나와는 크고 작은 160개의 섬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에 사람이 사는 섬은 50개 정도입니다. 고등학교가 있는 섬은 오키나와 본섬을 포함해 3개 섬뿐이고 대부분의 섬에는 고등학교가 없습니다. 이제나지마에도 고등학교가 없어 이제나지마 아이들은 중학교를 졸업하면 본섬에 있는 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저도 나하시 바로 옆의 하에바루초에 있는 현립 하에바루 고등학교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제나지마에서 하에바루초까지는 배와 버스를 갈아타고 4시간이상 걸립니다. 이제나지마에서 다니는 일은 도저히 불가능해서 나하에 있는 고모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습니다.
 하에바루 고등학교에는 향토문화 코스, 문리코스, 체육코스, 교양코스*5가 있습니다. 제가 하에바루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어 했던 건 향토문화 코스가 있기 때문입니다. 향토문화코스에서는 수학, 영어등 일반적인 과목 이외에 류가*6랑 오키나와 말, 산신*7, 오키나와 무용, 오키나와 가라테, 오키나와 역사등에 대해 공부합니다. 고등학교에서 오키나와의 예능과 역사를 공부하면 장래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 가는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제나」와의 갭에 고생하다
 나하에 살며 하에바루 고등학교에 다니게 된지 얼마 안되어 이제나에 있을 때에는 경험하지 못한 불편한 마음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제나에 있었을 때는 누구와도 친구처럼 마음을 열고 정답게 이야기 하며 늘 마음과 마음으로 대하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제나에서는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의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상대방과 거리를 두고 자신의 본심과 동떨어진 말을 하는 사람이 많은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인구가 많은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에바루 고등학교에서는 학생들의 태도가 나쁜데다 분위기도 어둡게 느꼈습니다. 즐겁게 하려고 마음을 먹으면 할 수 있는데 아무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섬에 있을 때처럼 즐겁게 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것저것 하면 할수록 자신이 주위로부터 멀어져 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제가 친구라고 생각했던 아이들조차도 본심과 다른 말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고 행동했는데 그것을 부정당하기도 하고 또 전혀 엉뚱한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계속되면서 점점 남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의 나쁜 점, 싫은 점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 이젠 남들과 별로 어울리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저는 명랑한 성격이라 사람을 사귀는데 소질이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도 처음 만나는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건성으로 대화를 하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인간이란 참 어렵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산신(오키나와 특유의 현악기) 동아리등 믿고 진심으로 대할 수 있는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학생회장을 경험하고
  2학년이 되어서는 이제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고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고민하는 가운데 여기에서 그만두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마음이 솟아올랐습니다. 「그렇다면 학생회장이 되어 스스로 이 학교를 밝고 즐거운 학교로 바꾸자!」고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 그리고 학생회장 선거에 입후보해서 당선되고 2학년 2학기부터 1년간 학생회장을 맡게 되었던 것입니다.
 학생회장이 되고나서 모두를 한데 뭉치게 하는 입장이 얼마나 힘든지를 알았습니다. 한사람 한사람의 기분을 존중해 주고 싶지만, 어떤 일을 실행할 때 전원의 의견을 반영시키기란 어렵습니다. 자신의 의견을 말하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으로부터 반감을 삽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자 점점 겁이 나서 아무것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친구들로부터 「너 바보야, 정말로 학교를 바꾸고 싶으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먹을 각오로 해」라는 격려덕분에 그럭저럭 해 나가고 있습니다.
 지금도 때때로 고민할 때가 있지만 「여기에서 좌절하면 제자리 걸음 밖에 안된다. 진취적으로 해야겠다」고 생각하려고 합니다. 모두에게 있어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앞으로는 더욱 의지를 강하게 갖고 임할 작정입니다. 「뭐, 좀 미움받는 거 어때!」라고 가볍게 넘겨버리려 합니다.

■음악에 관해
 제 생활의 중심은 음악입니다. 기타나 산신으로 곡을 만들어 부르기도 하고 수업시간이나 서클활동을 통해 오키나와의 고전음악과 민요를 배우며, 이제나 쇼엔 다이코의 멤버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어느 활동이나 다 좋아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물론 각각 다른 장르의 음악이지만 내겐 이건 전통음악, 이건 다이코, 이건 기타곡으로 나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파고들어가 보면 같은「음악」을 하고 있는 것일 뿐이며, 내게는 모든 것이 「음악」인 것입니다.
 제가 지향하는 것은 자신의 경험을 살려 독자적인 음이나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소 울음소리는 한마리 한마리 다 다릅니다. 어떤 소는 「음무-ㅅ」라고 울지만 어떤 소는 「음무우우우우우우ㅅ」하고 울지도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음이나 리듬은 한사람 한사람 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오키나와의 고전음악이나 민요에는 악보로 나타낼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같은 곡을 표현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미묘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는 각자가 지닌 개성으로 이론이나 기술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자신의 감성을 소중히 하면서 제 생각을 음악으로 자유롭게 표현해 가고 싶습니다.
 음악은 제게 여러가지 기회를 주었습니다. 올해 여름에 이제나지마에서 「이제나 쇼엔축제」가 있어 쇼엔다이코도 출연했습니다. 저는 새로운 곡을 만들어 그 연출도 담당했습니다. 곡을 완성시켜 가는 일 이상으로 어려웠던 것은 사람을 단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한명 한명에 대해 지나치게 생각하면 우유부단해지고 마음이 약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다같이 좋은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강제성을 지닌 리더십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실전을 향해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학생회나 향토예능부의 활동에서 경험한 것도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축제 때까지의 과정은 힘들었고 본무대에서의 연주도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만 저에겐 플러스가 된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장래에 대하여
 

 싱어 송 라이터가 되려는 생각은 중학생 때부터 변함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싱어 송 라이터가 되겠다든가, 미국 대학에 유학하여 본격적으로 음악공부를 하겠다는 등 여러 생각을 해 왔습니다. 하지만 마음만 겉돌 뿐 좀 현실성이 결여된 점도 있었습니다. 목표가 있기 때문에「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고 초조해 했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평생 음악을 할 거라면 초조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고장 예술대학이라면 오키나와의 고전음악 공부도 계속할 수 있고, 클래식도 공부할 수 있으며 해외공연도 갈 수 있습니다. 그 대학에 응시를 할까 생각 중입니다.

 

가족, 친구
 

■우리 가족
 너무 가까이 있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처럼 생각되지만 어떤 면에서는 저의 커다란 버팀돌이 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특히 부모님 곁을 떠나 학비와 생활비를 송금받으면서는 부모님의 고마움과 어려움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혼자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일을 해서 돈을 벌어 자식을 6명이나 키우시다니 정말 대단하시다. 감사해야지」하고 생각합니다. 저는 6형제의 장남이지만 남동생들 일은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마음상태가 썩어 빠진 녀석은 없기 때문에 제가 이러쿵 저러쿵 말하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의 친구
 건성으로가 아닌 진심으로 사귈 수 있는 친구가 내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다. 그런 친구와는 괴로움도 즐거움도 함께 나눌 수 있습니다. 여자친구와 헤어졌을 때도 친구는 곁에 있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도 친구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내 주변의 모든 사람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주위 사람들의 뒷받침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아무리 미운 사람도 어떤 면에서는 저에게 힘이 되어 주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무대활동등의 경험을 통해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적으며 정말 좋은 일은 혼자만의 힘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연애란 사람과 사람이 사귀는 것이므로 반드시 부딪히기도 하고, 서로의 안 좋은 면이 보이기도 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것까지도 감싸주며 서로 사랑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이해해 주려고 노력하는 사람, 그리고 나쁜 건 나쁘다고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좋습니다. 서로 존중해 주면서도 함께 있으면 마음 편한 관계가 이상적이겠죠.

 

나의 섬, 이제나지마
 

 이제나지마는 오키나와 북부에 있는 섬으로 프랑스를 축소해 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주위 약 18km, 인구 약2,000명의 작은 섬입니다. 제2 쇼시왕조*8 를 연 쇼엔왕*9이 태어난 땅으로 섬사람들은 그것을 큰 긍지로 삼고 있습니다.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 쇼엔다이코 이벤트가 있을 때등 1년에 10번정도 이제나에 돌아갑니다. 이제나의 자연 속에 있으면 마음이 푸근합니다. 나하에서 보는 하늘은 좁게 느껴지지만, 이제나의 하늘은 무한히 넓어 보입니다. 모래사장에서 혼자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도 없는 나만의 세계를 느낍니다. 파도 소리랑 살랑거리는 바람소리, 새들의 지저귐을 듣고 있으면 여러가지 이미지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 이미지를 곡으로 만들 때도 있습니다. 이제나는 작은 섬입니다. 하지만 거기에는 무척이나 큰 세계가 펼쳐져 있습니다. 이제나의 풍부한 자연이 그렇게 느끼게 만들어 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만사를 큰 눈으로 바라보고 싶고, 또 스케일이 큰 음악을 만들고 싶어하는 제게, 이제나의 「커다란 세계」는 아주 매력적입니다.
 장래 섬으로 돌아갈지 안 돌아갈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부모님은「좋을 대로 하렴」하고 말해 주십니다. 다이코를 계속하게 된다면 쇼엔다이코 사람들과 하고 싶습니다.

 

슌이치는 어떤 사람?
 

■어머니
 어려서부터 타인에 대한 편견이 거의 없어 길에서 만나는 아무에게나 인사를 잘 하는 아이였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도 귀여움을 많이 받았지요. 좀 특이한 구석도 있었네요. 언젠가 이웃집을 돌아다니며「고장난 텔레비전 없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었어요. 슌이치는 고장난 텔레비전이 있으면 고쳐줄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웃 사람들은 슌이치가 텔레비전을 갖고 싶어한다고 착각했겠죠. 그 때 근처에 그리 평판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가 살고 있었어요. 모두가 그 할아버지에 대해 좋게 말하지 않았지만, 슌이치는 「그 할아버지, 실제로는 좋은 사람이야」라는 말을 쭉 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그 할아버지가「이제 필요가 없어서」라며 텔레비전을 갖다 주셨거든요.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 무렵까지 엄청난 반항기였어요. 담배를 피우고 밤에 돌아다니고. 맏이였기 때문에 동생들을 위해서도 잘못된 길에 들어서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마음에 필사적이었지요. 한밤중에 몰래 방을 빠져나가지 않도록 아이들 방문을 부셔서 내다버린 적도 있었어요.
 슌이치는 원래 한가지 일에 저돌적인 타입. 지금은 그 힘이 좋은 방향으로 향해가고 있으니까 이대로 나쁜 방향으로 빠지는 일 없이 전진해 주었으면 합니다. 남들에게 폐가 되지 않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해 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실패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될테니까요.(TS-P09참조)

■친구 하야토
 슌이치는 밝고 무척 솔직합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금방 잘 어울립니다. 정신적으로 좀 나약한 면도 있지요. 아마 만사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탓일 겁니다. 그게 좋은 점이기도 하지만 무엇이나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는 탓에 적당히 편안해 진다는 일이 어렵겠지요.
 슌이치는 친구지만 음악에 있어서는 라이벌. 서로 좋은 자극을 주고 받는 사이입니다. 슌이치는 사고방식도 독특한 데가 있는데, 음악에서도 제가 생각지 못한 발상으로 곡을 만들 때가 있습니다. 저는 오키나와 고전음악밖에 아는 것이 없어 슌이치한테 배우는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 둘이서 오키나와 고전음악을 바탕으로 R&B등을 접목시킨 새로운 음악만들기에 도전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우리만이 만들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다는 공통된 꿈을 갖고 있습니다. 슌이치가 앞으로 어떻게 해 나갈까는 본인이 결정할 일이지만 앞으로도 좋은 라이벌로서 저 못지 않은 꿈을 갖고 분발해 주기를 바랍니다. (TS-P11참조)

■쇼엔다이코 멤버
A: 「멤버 중 제일 혈기왕성한 녀석」
슌이치:「그렇습니다!!」

B: 「곡도 만들 줄 아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
슌이치:「당연한 말씀!」

C: 「좀 특이하지만 진심을 말하는 좋은 녀석」
슌이치:「본심을 드러내지 않으면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는 음악이란 불가능해요-!」

D: 「모두를 결속시켜 이끌어 가는 힘이 있다」
슌이치:「그럴 수 있는 힘을 지니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모두를 이끌어 간다는 건 힘든 일이라 생각한다」
(TS-P12참조)

 


 

*1 일본 최남단, 최서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서 1,000km, 남북 400km에 달하는 광대한 해역에 점점이 떠 있는 크고 작은 160개의 섬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 중 유인도는 50개. 일본의 유일한 아열대 해양성 기후 지대이다. 1429년에 쇼하시가 제1쇼씨 왕조를 연 이후, 1879년에 메이지정부가 오키나와현을 설치하며 제2쇼씨 왕조가 붕괴되기까지의 450년간, 류큐왕국으로 존속했다.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서는 지리적 조건을 살려 중국과 동남 아시아 제국과의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다. 또한 그 나라들의 영향을 받아 염직, 칠기, 도기, 풍속예능등 오키나와 특유의 문화를 만들어냈다. 제2차 세계대전말에는 지상전이 벌어졌다. 패전후는 미국에 의한 점령통치하에 들어갔다가 1972년에 일본에 반환되었다. 현 총면적의 11%를 미군기지가 점하고 있다. 주요 산업은 관광업을 중심으로 한 제3차 산업. 인구 약1,325,000명(2001년). 사진의 지도를 참조

*2 오키나와 본섬 북서부에 위치한 섬. 제2쇼씨 왕조의 시조 쇼엔왕의 출생지로 알려져 명승고적이 많다. 면적 15.4km, 인구 약2,000명(2001년). 주요 산업은 농업과 수산업. 사진의 지도를 참조

*3 오키나와 본섬 남서부, 동지나해에 면한 현청 소재지. 류큐왕국시대부터 도읍지의 무역항으로 번성했다. 1879년 오키나와현이 설치되고 현청 소재지가 되었다. 오키나와현의 정치, 경제, 문화, 교통의 중심지. 인구 약304,000명(2001년). 사진의 지도를 참조

*4 일반적인 학과시험을 거치지 않고 중학교 교장의 추천과 내신, 면접, 소논문이나 학업이외의 업적(스포츠등)등을 기준으로 하여 고등학교 입학을 판단하는 입시제도.

*5 하에바루 고등학교는 보통과에 문리, 체육, 향토문화, 교양 4코스가 개설되어 있다. 향토문화 코스에서는 「오키나와의 역사」「류가, 방언」등의 필수과목 외 「류큐무용」「고전무술」「산신」을 선택과목으로 이수한다.

*6 아마미, 오키나와, 미야코, 야에산 섬들에 전승되는 서정적 단편시 형식가요의 총칭. 윗구8, 8, 아랫구8, 6의 30음으로 이루어지는 단편 정형시가 주류. 하이쿠나 와카와 달리 류가는 산신에 맞춰 부르는 노래로서 발전해 왔다.

*7 오키나와, 아마미제도 지역에서 사용되는 현악기. 15세기부터 16세기초에 중국으로부터 전해졌다. 오키나와 고전음악이나 민요의 반주악기로서 널리 사랑받고 있다.

*8 1429년 쇼하시가 이룩한 제1쇼씨 왕조에 이어 쇼엔이 1470년에 연 왕조. 1879년에 일본정부가 류큐왕국의 폐지와 오키나와현의 설치를 선언하기까지 약400년간 존속했다.

*9 1415~76년. 제2쇼씨 왕조의 시조. 이제나지마 출신.

*10 2000년7월에 오키나와현, 후쿠이현, 미야자키현에서 개최되었다. 오키나와현 나고시에서는 주요8개국 수뇌회담이 열렸다.

*11 2000년 7월에 큐슈, 오키나와에서 개최된 큐슈, 오키나와 서미트에 앞서 동년 6월에 오키나와현에서 개최된 G8고등학생 서미트. 평화, 환경, 경제에 관해 각국의 젊음이들이 의견을 나누었다.

*12 급식조리실이 없는 초, 중학교를 위해 지역 급식센터가 점심을 조리하여 각 학교에 배달한다.

*13 우치나구치(오키나와 말)로 연기하는 대중연극.

*14 오키나와현 나하시에 있는 구 류큐왕성. 1406년에 쇼하시가 오키나와에 있던 3개의 소국가 중의 하나인 추잔을 침략한 이래 류큐국 지배의 중심지가 되어 1879년까지 쇼하시 왕족 7대, 쇼엔왕족 19대가 거처했던 성이다. 제2차 세계대전말에 폭격에 의해 목조 건축물은 잿더미로 변했다. 1992년 복원된 부분이 슈리성 공원으로 개원. 2000년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15 6월 23일. 제2차세계대전 말기에 벌어진 오키나와 전투를 중심으로 한 전몰자의 혼을 달래는 날로, 오키나와현 공휴일로 되어 있다. 1945년 이 날 오키나와에서의 일본군의 조직적 전투가 끝을 맺었다.

*16 제2차 세계대전말 오키나와 본섬과 그 주변 섬들에서 벌어진 미일간의 전투. 미군은 1945년 4월에 오키나와 본섬에 상륙, 섬 중남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을 벌여 주민을 포함한 약 20만명의 희생자를 냈다. 일본군 사령관의 자결로 인해 군의 조직적인 저항은 6월 23일에 종료되었다.

*17 제2차 세계대전말, 오키나와에서 간호보조사로 강제나 다름없이 동원되어 많은 희생자를 낸 현립 제일여자고등학교와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의 직원, 학생으로 이루어진 학도군.

*18 통조림돼지고기를 얇게 썰어서 굽고, 소금으로 간을 한 계란 후라이와 채친 양배추를 곁들인 오키나와 요리.

*19 고등학생 창작활동의 향상과 상호 이해를 심화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예술문화활동을 발표하는 고등학생들의 제전. 연극부문, 미술, 공예부문, 향토예능부문, 사진부문등으로 나뉘어 매년 개최된다. 문화청등이 주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