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y Way Your Way


Dance with Life

vol.1

더 자유롭게 춤추고 싶다

오마에 고이치, 오사카

2016.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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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길(You Sung Gil)

오마에 고이치 씨는 14년 전에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왼쪽 다리의 무릎 아래를 절단했다. 꿈꾸어 오던 무용단의 오디션을 받기 위해 니가타로 가기 바로 전날 밤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절망이 아니었다. 뒤이어 찾아온 커다란 좌절과 절망을 뛰어넘어, 그는 프로 무용수로서 무대에 선다.


希望の前夜に

구급차로 옮겨져 통증으로 의식이 몽롱한 가운데 의사가 하는 말이 들렸다.
"다리를 절단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그 의미를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오랫동안 갈망해 오던 가나모리 조 선생님이 이끄는 '노이즘(Noism)' 무용단에 들어갈 거라고.

눈을 떠 다리를 보니, 짧아진 왼쪽 다리의 무릎 언저리가 농구공만 하게 부어올라 있다. 극심한 통증이 밀려온다. 그래도 니가타에 가야 돼. 비록 오디션은 받지 못할지라도, 아무튼지 가서 보여 줘야 돼. 그런 생각을 하며 휠체어를 타고 가려 했지만 저지당했다. 붕대에 피가 배어 나와 있었다. 그래도,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가고 싶었다.

이때만 해도 아직 '노이즘' 무용단의 일원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어떻게 하면 '노이즘'이라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그것만을 생각했다. 4개월 후, 드디어 완성된 의족을 끼웠다. 감각은 마치 스키화를 신은 듯했지만, 문제 없이 걸을 수 있었다. 그리고 스튜디오에 가서 늘 하던 대로 연습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대로 움직여지지가 않는다. 예전 같으면 눈 감고도 출 수 있었던 춤이 추어지지 않는다. 점프를 하면 와당탕 고꾸라졌다. 예상 밖이었다. 다섯 번째로 넘어지며 '오늘은 더 못 하겠다.' 싶었을 때, 네 손발로 엎드린 채 울고 있었다. 더는 일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남 앞에서 운 건 이때뿐. 커다란 좌절감과 절망을 처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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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용 의족. 처음 사용했던 의족도 이런 형태였다.
©유성길(You Sung Gil)

앞으로 나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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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부분들을 주문해 수없이 고쳐 만들어 가면서 완성한 의족. 이 의족으로 발레도 춘다.
©유성길(You Sung Gil)

그래도 나는 '노이즘'을 향해 가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낼 거고, 뭐든지 할 테니, 나는 저 세계로 돌아가고 싶고, 반드시 돌아갈 테다. 그렇게 생각했다. 목적지로 가는 최단 루트가 사라졌어도, 어떤 루트로 가면 갈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의족이 최대한 진짜 다리에 가까워진다면, 원래대로 춤을 출 수 있을 것이다. 의족을 개량하면 돼.

처음 춤을 추었을 때 걸리적거렸던 것은 발목부터 그 아래쪽. 발끝을 쭉 펴지 않고 추는 춤이라니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건 이래야 한다고 생각했던 고집을 접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의족의 발목 아래를 잘라 달라고 한 것이다. 하나의 결단이었다.

1개월 후, 발목 아래가 없는 의족으로 춤을 추어 보았다. 역시 춤추기가 수월하다. 아름다운 춤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지만, 목적지에 한 걸음 더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그 후로도 의족의 각 부분들을 주문하여, 어떻게 조립해서 어떻게 가공하면 더 춤을 잘 출 수 있을지를 연구해 가지고, 의족 기사에게 부탁해 수없이 많은 의족을 만들어 보았다. 지금 같은 형태에 도달하기까지 8년이 걸렸다.

커다란 절망

'노이즘'의 오디션을 매년 보았다. 처음에는 조 선생님도 응원해 주셨다. 그런데 5년째였나? 조 선생님이 "너는 노이즘의 무용수는 될 수 없다."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야간 버스를 기다리던 2~3시간 동안, 눈물이 쏟아졌다. 우는데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도대체 지금까지 내가 뭘 해 온 건가?' 조 선생님의 춤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곧바로 그 춤과 사랑에 빠져들었다. 여러 해를 그 춤을 바라보며 맹훈련을 해 왔는데 그 끝이 실연이라니. 나라는 존재가 통째로 부정당했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내 다리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시간을 춤추기가 어렵다. 오래 춤을 추면 격심한 통증이 와, 결국 춤을 못 추게 된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매일 레슨에 참가하고 리허설을 하는 지구력은 없다. 무용단을 따라갈 수 없다는 건 분명했다. 다리가 없는 게 보기에 안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다리가 없는 걸 안 보여 주려고, '다리가 있는 무용수'와 똑같이 춤추는 것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나한테는 다리가 없다. '다리가 있는 무용수'로서 그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조 선생님의 선고를 받고서야 겨우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가 할 수 있는 동작을 내가 만들어 나가는 수밖에 없지. 그렇게 마음을 고쳐 먹었다. 프로로서 멋진 무용수가 되어 관객을 불러 모으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다. 이것이 새 목적지다. 이러면서, 보기에 안 좋은 나 자신을 받아들이는 데 1년이 걸렸다. 열등감을 끌어안고, 나 자신의 동작을 모색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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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길(You Sung Gil)

보이지 않는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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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족 없이 춤을 출 때는 그릇처럼 생긴 것을 끼운다. '오마에 댄스 용'이라 부른다.
©유성길(You Sung Gil)

사고를 당하고 나서 약 10년간은 오직 생활을 위해 푼돈을 버는 나날이 이어졌다. 사고 전에는 발레를 해서 제법 일이 있었지만, 그 수입원이 일절 끊어진 상황이라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대부분이 계속 서 있는 거라든지 육체 노동이라든지....... 의족에도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때라, 튀어나온 뼈가 닿는 게 아파서 자주 의족을 벗곤 했다. 항상 몸 어딘가를 꼬집힌 상태에서 생활하는 셈이어서, 늘 통증을 참고 있었다. 춤 연습은 매일 하고 있었지만, 미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는 그런 나날이었다.

동정은 필요 없다

가끔 연락이 와서 무대에 설 기회도 있었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많은 무용수들과 무대에 선 다음, 다른 무용수는 보수를 받는데 내가 받는 것은 보수가 아니라 '사례금'이라는 거였다. 보잘것없는 액수였다. 의족의 무용수는 사람들에게 감동은 줄 수 있었는데, 보수는 받을 수 없었다. 원하는 건 동정이 아니다. 장애인이 참 열심히 사네. 이런 말 따위는 필요 없다. 무용수로 봐 달라.
그러면서도 이렇게 생각했다. 이건 나한테 아직 기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력이 더 좋아지면, 같은 액수의 보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을 믿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나는 계속 믿었다. 나는 목적지에 갈 것이다. 갈 수 있을 것이다. 중요한 건 형태가 어떻게 바뀌든지 거기에 가는 것이다. 나는 변화하는 것을 계속 받아들였다. 이런 무용수가 되려 했던 것은 아니었으므로, 나의 본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형태라도 좋다. 반드시 프로 무용수가 되어 보일 테다. 그래서 의족도 개량하고, 다리에 부담이 되지 않는 춤을 추기 위해 몸 움직이는 법을 연구하고, 다양한 춤을 배우러 갔다. 스트리트 댄스, 재즈 댄스, 모던 댄스, 일본 무용....... 무도도 배웠다. 필사적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에서 장애인 무용수로 보이는 것은 여전히 싫었다.

의족을 벗고 춤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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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라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를 공연할 때의 의상. 가장 좋아하는 의상이다.
©유성길(You Sung Gil)

2012년경에 무용가인 사토 노리코 선생님을 만났다. 선생님은 의족을 벗고 춤을 추면 어떻겠느냐고, 그런 작품을 만들겠다고 했다. 작품 제목은 「다리 없는 카나리아」. 나는 무엇보다 춤 하나하나의 동작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사토 선생님은 작품 전체의 스토리와 구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의족을 벗고 춤을 추니 움직임이 편했고, 무엇보다 통증에서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나의 가능성이 확장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 자신의 매력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 그 단서를 얻은 것이다.
그 후 의족을 벗고 춘「눈을 뜨라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가 나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 되었다. 또 작품의 배역에 따라 의족도 바꾼다. 예를 들어 피에로일 때는 오른쪽 다리보다 긴 의족을 사용한다.

다가가면 멀어지는 것

요즘에는 점차 의족 무용수라 불리지 않게 되었다. 다양한 훈련을 쌓아 오면서 보통 사람과 똑같은 동작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내가 목표로 삼아 온 것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될 때 한계가 보이기 시작한다. 결국, 내가 다리 있는 무용수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자, 그러면 어떻게 해야 멋진 춤이 될 것이며, 나의 가능성을 살릴 수 있을 것인가? 의족이라고 하는 사실을 활용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족이라는 사실을 포함한 모든 것을 나의 매력으로 만들고, 그러한 내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해 준다면, 그때 비로소 프로 무용수가 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밖에 출 수 없는 춤

나밖에 출 수 없는, 이런 다리를 가진 사람만이 출 수 있는 춤을 추고 싶다. 요즘은 의족을 하고 춤을 추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 의족을 한다는 것 자체가 보통 사람을 뒤따르고 있다는 것이므로, 여기서 이미 지고 들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래서 리우데자네이루 패럴림픽의 폐회식에서 의족을 하지 않고 다리 하나로 백턴(손 짚고 뒤돌기)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깜짝 놀라게 4연속 백턴을 고집했다. 이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장애를 가진 사람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이다.
폐회식에서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백턴뿐만 아니라 춤도 보여 주었다. 사람들에게 뭔가 느낌이 전달되지 않았을까?

더욱 자유롭게

나는 프로로서, 나 자신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동작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 춤을 통해 자유로워지고 싶다. 내가 마음에 그리는 춤을 춤으로써 자유로워질 것이다. 지금보다 더더욱 자유로워지고 싶고, 자유로워질 거라고 생각한다. 부자유했던 시간이 길었으므로, 나는 남들보다 훨씬 자유를 생각하는 마음이 강하다. 몸을 개량함으로써, 나는 내가 마음에 그리는 동작을 더욱 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춤을 처음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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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길(You Sung Gil)

중학교 2학년 때, 3학년 환송회를 하며 무대에서 연극을 하게 되었다. 중학생 때는 남의 눈에 띄는 일을 별로 나서서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데 반 친구들이 "네가 해라." 해서 준주연을 맡았다. 소품도 나름대로 연구해서 해 보았다. 공연은 큰 박수를 받았다.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초등학교 때부터 나를 괴롭혀 오던 녀석들의 태도가 싹 바뀌었다.
내가 실력 발휘를 할 수 있는 곳이 여기구나! 무대에 서는 일을 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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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구마몬(구마모토 현의 캐릭터) 모자와 티셔츠. 내 블로그에 올리는 동영상에는 구마몬 모자를 쓰고 등장할 때가 많다.
©유성길(You Sung Gil)

화려한 세계에 대한 동경

뮤지컬 배우가 되기를 꿈꾸며 연극부가 있는 고등학교에 진학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발레를 배우기 시작했다. 발레에 푹 빠져들었다. 화려한 발레의 세계에 대한 동경도 있었다.
아버지는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언제나 더러운 작업복에 목장갑을 끼고, 낡은 경트럭에 목재를 싣고 일하러 나갔다. 늘 창피하다고 생각했다. 이따위 세계, 진짜 싫다 싶었다.

볼품없어도 좋다

차에 치여 병원에 실려 가자 가족들이 달려왔다. 물론 아버지도. 아버지가 "괜찮다. 넌 괜찮다." 이렇게 말하면서 두 손으로 내 오른손을 잡았다. 운동용 글러브처럼 투박하고 거칠며 더러운 손이었다. 그런데 안심이 되었다. 아버지는 내 편. '난 괜찮다. 살아갈 거다.' 이렇게 아버지와 약속을 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삶은 볼품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강해. 나도 볼품없을지라도 살아갈 거다. 볼품없을지라도 계속 춤을 출 거다. 그렇게 생각했다. 춤에는 반대했던 아버지도 내가 계속 하는 것을 보며 인정했다.
그리고 괴로움 속에서 발버둥치며 프로 무용수가 된 지금은 아버지가 볼품없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나 자신도 볼품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볼품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남들보다 지는 것을 싫어한다. 언젠가는 갚아 주리라 하는 마음으로 계속 노력해 왔다.

누구나 거침없이 변화를 받아들여도 된다. 나 자신도 변화해 왔다. 지금까지 내가 '아름다운 것'이라 생각해 왔던 것도 나의 협소한 취향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것은 아주 많다. 우선 알아야 할 것은 자기 자신의 아름다움이다. 내 경우에는 다리가 없다는 것이다.

지금 나는 너무나 즐겁다. 나는 더 자유로워질 것이다. 그러한 확신이 있으니까.
다리가 있을 때와는 다른 몸의 사용법도 알게 되었고, 예전보다도 몸을 더 잘 쓰게 되었다.
나는 춤으로 나 자신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터뷰: 2016년 10월
구성: TJ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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